단재 신채호 기념관에서 만나는 독립정신
단재 신채호 기념관에서 만나는 독립정신
충북 청주시 낭성면 고드미마을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사당과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신채호기념관도 함께 있어, 방문객들은 선생의 삶과 정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념관은 청주 외곽의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되며, 전시관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또한 문화관광 해설 프로그램이 운영되어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여러 차례 진행되는데, 사전 예약은 물론 현장 신청도 가능합니다. 해설사와 함께 관람하면 단순한 전시 관람을 넘어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신채호 선생의 영정사진입니다. 선생은 "내가 죽으면 왜놈들의 발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옥중에서 순국하셨지만, 조국과 겨레를 향한 일편단심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기념관 내에는 신채호 선생의 연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낭성면 귀래리로 이주하여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26세에 성균관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논설을 통해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국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셨습니다.
전시관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여러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하이, 한나라,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던 모습부터 여순감옥 수감 시절까지 그의 삶의 궤적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특히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가 신석우, 신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은 그 시대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합니다.
기념관에는 단재 선생의 독특한 세수법에 관한 일화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배 아래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허리와 고개를 굽히지 않고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을 닦았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그의 자존과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원세훈, 소설가 심훈, 신백우 등 여러 인물이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에 관한 회상과 글도 전시되어 있어, 그의 인품과 정신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영상관에서는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짧은 영상을 통해 그의 삶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으며, 고문 도구 전시를 통해 당시의 고통과 투쟁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본 후에는 야외에 위치한 신채호 선생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모습의 동상 옆에는 부인 박자혜 여사도 함께 자리해 있어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합니다. 이곳은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전통 목조 건축양식인 겹처마 맞배지붕의 정갈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당 옆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채호 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에는 묘표, 상석, 석등, 문인석, 망주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묘표는 한용운 등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세웠습니다. 묘소 옆에는 선생의 할아버지가 단재의 저서 <자치통감> 출간을 기념해 심은 130년 된 모과나무가 있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끕니다.
이처럼 단재 신채호 사당과 묘소, 기념관이 위치한 고드미마을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풍경 속에서 선생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입니다.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이들에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느껴볼 것을 권합니다.
